이영종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북한 국무위원장 겸 노동당 총비서인 김정은이 지난 9월 2~4일 중국을 방문했다. 2박 3일 체류 일정의 주목적은 중국 전승절(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 행사 참석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국민당 정부에 비해 미온적이었고, 2차 세계대전 종전에 따른 ‘전승’에도 큰 관심이 없었지만, 시진핑은 집권 이후 전승절 행사를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자리로 삼아왔다. 여기에 김정은이 초청받아 참여함으로써 6년 8개월 만의 방중이 이뤄진 것이다.
이번 방문은 앞서 김정은이 4차례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과 만났던 것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2018년 3월 25~28일 베이징을 찾아 북중 정상회담을 가진 한 달 뒤 김정은은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첫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이후 방중도 남북 정상회담이나 싱가포르‧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전후한 시기에 이뤄졌다. 주로 대남, 대미 협상 국면에서 중국 지도부와의 조율이나 사전 또는 사후 협의 성격이 짙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국 전승절 80주년을 계기로 시진핑과 푸틴 대통령을 함께 만나 북중러 연대를 과시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26개국 정상급 지도자들이 모인다는 점에서 김정은에게는 첫 다자 무대 데뷔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시진핑‧푸틴과의 대면에 비하면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북중러 연대 과시에 초점
김정은의 이번 방중은 북러 밀착에 따라 상대적으로 소원해진 것으로 평가받아온 북중 관계를 복원하고, 첫 다자외교 무대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측면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시 주석을 중심으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이 톈안먼(天安門) 망루에 나란히 선 모습을 국제사회에 보여줌으로써 북중러 연대를 과시한 점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일방적 외교‧무역 공세에 맞서겠다는 나름의 의지를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지난 8월 25일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미 대통령이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 김정은을 대화와 협상의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구상을 구체화한 점에 대해 선을 긋고, '사실상의 핵 보유국'이자 북중러 연대의 한 축인 북한의 몸값을 올리려 한 의도도 있다고 판단된다.
김정은 입장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의미 있는 대목은 시진핑 국가 주석과 만나 북중 친선관계의 '불변성'을 확인한 정상회담 논의였다고 볼 수 있다. 9월 5일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시 주석은 회담에서 “중조(중국과 조선)는 운명을 같이하고 서로 돕는 훌륭한 이웃이고 훌륭한 벗이며 훌륭한 동지”라며 “중국 당과 정부는 전통적인 중조 친선을 고도로 중시하고 있으며 중조 관계를 훌륭하게 수호하고 훌륭하게 공고히 하며 훌륭하게 발전시킬 용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정은이 전승절 80주년을 계기로 중국을 찾아 '자리를 빛내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중국 측이 북한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풀이된다.
북중 정상 모두가 '국제정세의 변화'를 언급하면서 전승절 행사를 계기로 드러난 북중러 연대와 한미일 공조의 대립 구도가 심상치 않게 흘러갈 것임을 공통으로 예견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북한의 안러경중 의도
사실 북중 관계는 지난해 10월 김정은이 러시아를 지원하겠다는 명분으로 우크라이나에 대규모 전투병력을 파견하면서 불협화음을 낸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지난해 초 북중은 수교 75주년을 맞아 '북중 우호의 해'를 선포했지만, 연말에 이에 대한 언급이나 폐막행사조차 없이 흐지부지된 건 냉랭해진 양측 관계를 상징하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김정은은 북중 복원을 가시화하면서도 러시아와의 밀착 관계를 관리하는 데 신경을 썼다. 베이징 전승절 행사 당일 오후에 푸틴과 정상회담을 하고 북한군 파견에 따른 러시아 측의 사의를 다시 한 번 확인받는 자리를 만들어 북러 관계가 견고하다는 점을 드러냈다. 회담장을 향하면서 푸틴의 전용 차량에 동승해 이동하는 모습을 드러낸 것도 이런 차원일 수 있다. 시진핑의 환대에 푸틴의 각별한 '감사'까지 더해져 중러 모두에게 러브콜을 받는 장면을 연출한 건 김정은에게 흡족한 성과로 받아들여질 공산이 크다.
이번 방중 기간 김정은은 중러와 각각 정상회담을 함으로써 향후 핵과 미사일 관련 도발이나 전력 고도화에 따른 한미일의 대북 대응에 맞설 우군으로 중국과 러시아 모두를 확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북러 밀착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 경제 원조 확보에 중국의 힘이 실릴 것으로 예상된다. 김정은이 "호혜적 경제무역 협력을 심화함으로써 더 많은 성과를 거두자"고 강조한 대목은 북한이 필요한 식량이나 원유‧생필품 등의 확보를 노린 포석일 수 있다.
이를 두고 한국이 한때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과, 경제는 중국과 협력)을 염두에 뒀던 것처럼 북한도 안러경중을 하려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권력 후계구도 굳히기 포석
다자외교 무대 데뷔를 통한 과외 소득도 짭짤했다. 김정은은 12살 딸 주애를 전용 열차에 함께 태워 베이징역에 등장함으로써 현지 언론은 물론 유력 외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했다. 북한의 4대 세습 후계자로 유력시되던 주애가 '확실' 쪽으로 옮겨가는 듯한 장면을 만들어 체제 내부뿐 아니라 국제사회로부터도 권력 후계 구도를 인정받고 굳히기에 들어가려는 포석이란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김정은의 일정이나 북중 관영 선전매체 보도 내용을 보면 양측 관계가 여전히 불협화음을 내는 듯한 석연치 않은 대목도 드러난다.
첫째는 김정은이 베이징에서의 이틀 밤을 모두 북한 대사관에서 잤다는 사실이다. 손님을 맞는 쪽이나 방문하는 측에서 가장 핵심 중 하나는 숙소 문제다. 그런데 시진핑은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중국 방문 때 주로 써온 국빈관 댜오위타이(釣魚臺)의 18호각을 내주지 않아 홀대론에 불을 지폈다. 이 때문에 김정은은 딸 주애, 수행 간부들과 함께 차오양구에 있는 북한 대사관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대북 정보 관계자는 “푸틴 대통령이 18호각을 차지하는 바람에 대사관으로 정해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둘째는 북중 정상회담의 시점과 결과 발표를 둘러싼 양측의 '동상이몽'이 드러난 대목이다. 김정은은 초청 측인 시진핑과의 회담보다 앞서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고, 하루 뒤 베이징 출발 직전 시진핑과 만찬을 포함한 북중 정상회담을 가졌다. 9월 3일 오전 전승절 군사 퍼레이드와 오찬 연회를 마친 김정은은 곧장 푸틴의 전용 차량에 동승해 댜오위타이로 옮겨가 회담을 했다. 시진핑이 마련한 잔치상에서 북러 밀착을 과시하는 행보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북중 정상회담 결과 발표에서도 양측의 미묘한 입장차를 보여주는 모습이 감지됐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같은 달 4일 보도에서 “대만‧티베트‧신장 등 중국의 핵심 이익과 관련된 문제에서 확고히 중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중국이 국가 주권과 영토 보전을 수호하는 것을 지지할 것”이라고 김정은이 시진핑에게 밝힌 것으로 전했지만, 북한 관영 매체들은 이 대목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셋째는 김정은이 중국 방문에 딸 주애를 동반한 데 대한 중국 측의 미묘한 대응 기류다. 김정은은 2일 오후 베이징역에 도착하면서 주애를 최선희 외무상보다 앞세워 자신의 바로 뒤를 따르게 함으로써 존재감을 부각시키려 했다. 후계자로 점쳐지는 주애의 등장에 현지 매체는 물론 유력 외신의 스포트라이트가 맞춰지는 시점을 겨냥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첫 보도를 낸 중국 신화통신은 주애의 모습이 김정은의 얼굴에 거의 가려지게 앵글을 잡은 사진을 내보냈다. 주애냐 아니냐를 두고 설왕설래가 이어지는 시점에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보란 듯이 김정은을 수행하는 모습의 주애 사진을 외부에 전송했다.
한미일 3자 구도 대응에 따른 신냉전 돌입
김정은이 중국 전승절 행사 참석을 막판에 확정한 건 이재명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 결과에 자극받은 바 클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이 대통령이 예상을 깨고 한미 정상회담을 하러 가면서 일본에 들러 이시바 총리와 만나 한미일 3자 구도의 대북 연대가 강화되는 기색이 역력해지자, 북중러 연대를 통한 대응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란 측면에서다.
한미 정상회담 이후 오는 10월 말 경주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김정은을 초청하는 문제와, 불발 시 플랜 B로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김정은과 전격 회동하는 등의 구상을 짜온 이재명 정부로서는 이번 김정은의 중국 방문이 가져올 파장이나 변동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평양 귀환 뒤 김정은의 행보에도 눈길이 쏠렸다. 그가 첫 공개 행보로 9월 8일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쓰일 엔진 분출 시험을 참관하고 신소재인 '탄소섬유 복합재료' 연구시설 등을 돌아봤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이 자리에서 “대출력 탄소섬유 고체 발동기 개발이라는 경이적인 결실은 최근 우리가 진행한 국방 기술 현대화 사업에서 가장 전략적인 성격을 띠는 성과”라면서 “핵 전략 무력을 확대·강화하는 데서 중대한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김정은은 전승절 80주년 참석을 위해 베이징을 향하면서 지난 1일 화학재료종합연구소를 찾아 탄소섬유 복합재료 생산 공정과 대출력 미사일 발동기 생산 실태를 파악했다고 중앙통신이 전한 바 있다. 당시 중앙통신은 이 고체 엔진이 화성-19형 계열들과 다음 세대 ICBM인 화성-20형에 이용될 계획이라고 밝혀, 지난 2023년 11월 시험 발사한 화성-19형보다 진화한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음을 알렸다.
전승절에 참가해 중국의 첨단 스텔스‧무인 항공기와 함정 및 핵 어뢰 등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 김정은이 내친김에 북한 핵과 미사일은 물론 재래식 전력의 고도화에 박차를 가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베이징에서의 북중러 간 ‘나쁜 결탁’이 가져올 파장은 올가을 한반도와 주변 정세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