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대한민국 앞에 놓인 몇 갈래의 길은 모두 험로다. 어느 길을 택하든지 안보 유지, 경제 발전, 국민 행복이라는 국가 목표를 향한 우리의 여정은 순탄치 않을 것이다. 파국의 길만은 피해야 한다. 안타깝게 정치세력은 물론 주권자인 국민도 그 어느 때보다 분열돼 있다. 국가위기 상황에서 여전히 국익보다는 당파적 이익, 집단과 개인의 이익을 앞세운 주장이 난무한다.
대한민국은 복합위기에 빠졌다. 안으로는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내란 혐의로 구속된 상태에서 탄핵심판이 진행 중이다. 밖으로는 북한의 핵 능력 고도화, 북·러 군사협력 심화, 트럼프 2기 출범 등으로 한반도 주변 외교·안보 지형이 요동친다. 세계 각국이 트럼프 2.0 시대를 맞아 국제정세 지각변동에 대응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으나 우리는 외교·안보 정책을 지휘할 총사령관이 부재하다.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에 따른 탄핵 사태로 대한민국의 ‘외교 시계’는 사실상 멈춰진 상태다. 탄핵심판 결과를 예단할 수 없지만, 탄핵 사태의 충격파는 괴멸적이며, 지속력도 상상 이상일 것이다. 탄핵 사태와 트럼프 2기 출범을 계기로 조성된 복합위기 국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할 수도 있다.
* 백악관 홈페이지 캡처
현직 대통령이 내란 혐의로 구속돼 3평 남짓한 감방에 갇힌 상황에서 우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을 지켜봐야 했다. 제45대에 이어 제47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트럼프 대통령은 1월 20일(현지 시간) 워싱턴 D.C 미 의회 의사당 중앙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미국의 황금시대는 이제 시작된다”라면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Make America Great Again: MAGA)라고 선언했다.
트럼프는 취임사에서 “나는 트럼프 행정부 임기 중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우 단순히, 미국을 최우선시할 것”이라면서 집권 1기 때와 마찬가지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국정의 모토로 내세웠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취임사에서 “우리는 세계에서 본 적 없는 가장 강력한 군대를 건설할 것”이라고 힘에 의한 평화를 대외정책의 기조로 삼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밖에 트럼프 대통령은 남부 국경 비상사태 및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 선언, 무역 시스템 재점검 및 외국에 대한 관세 부과, 전기차 우대 정책을 포함한 바이든 행정부의 친환경 산업정책 종료 등을 약속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즉시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 등 80건가량의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캐나다와 멕시코를 대상으로 다음 달부터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말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건 트럼프 대통령의 귀환에 따라 세계는 중대한 변곡점을 맞게 됐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두 개의 전쟁’, 미·중 전략경쟁, 북한 핵 문제 등 주요 이슈들이 새로운 흐름을 탈 전망이다. 당장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일을 닷새 앞둔 1월 15일, 전쟁 발발 467일 만에 휴전에 전격 합의했다. 미국의 힘을 앞세워 외교적 목표를 관철하는 트럼프 특유의 ‘최대한의 압박(Maximum Pressure)’ 전략의 효용성이 입증된 것이다.
트럼프는 취임식 전에 인질을 석방하지 않으면 ‘지옥의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하마스를 압박하기도 했다. 또 휴전에 미온적이던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도 수차례 전쟁을 멈추라고 종용했다. 일각에서 이번 휴전이 네타냐후 총리가 트럼프에게 보낸 ‘취임 선물’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트럼프 2기 출범으로 3년 가까이 이어진 러-우 전쟁도 새 국면을 맞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식 직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회담 의사를 밝히면서 러-우 전쟁의 조속한 종식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도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몇 시간 전 취임 축하와 함께 미국과의 대화의 문을 열어 두겠다고 밝힌 점으로 미뤄 머지않아 양측이 러-우 전쟁 종식을 위한 협상에 나설 가능성이 커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직 협상안을 공식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다. 다만 트럼프의 외교·안보 정책에 관여하는 측근들의 발언으로 트럼프의 구상을 엿볼 수 있다. 대체로 트럼프 대통령은 ‘현재의 전선 동결 및 비무장지대 설정+우크라이나의 나토(NATO) 가입 20년 유예’를 협상안으로 준비 중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 생각이 다르다. 러시아는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를 차지하는 것 이외에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철회를 휴전 조건으로 내세운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을 전제로 러시아에 빼앗긴 영토를 할양할 용의가 있다는 쪽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취임사로 열린 군장병과의 무도회에서 주한미군인 캠프 험프리스 장병들과 영상통화를 하고 있다.
트럼프 2기 출범으로 우리나라도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문제를 비롯한 한미동맹, 대중국 견제, 북핵 문제, 관세 및 공급망 정책 대응 등 안보 및 경제 측면에서 중대한 도전 과제를 떠안게 됐다. 첫째,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문제다. 우리 정부는 미 대선 직전 미국 정부와 2026년 기준 1조 5천192억 원 규모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을 타결 지었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재협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둘째, 북핵 문제에서 ‘한국 패싱(Passing)’ 가능성이다. 만일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 능력 동결 또는 감축과 대북 제재 해제를 교환하는 조건으로 북핵 문제에 합의한다면 이는 사실상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이어서 우리에게는 ‘재앙’에 가까운 안보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트럼프는 취임 첫날 김정은을 언급하면서 ‘뉴클리어 파워(nuclear power, 핵 능력 보유국 또는 핵능력 보유 세력이라는 뜻)’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앞서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지명자도 북한을 ‘뉴클리어 파워’로 지칭한 바 있다. 이들 발언은 트럼프 2기에서 북한 비핵화에 대한 정책이 변경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게 한다.
셋째, 미·중 전략경쟁 심화와 한국의 연루 문제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는 것을 대외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는 트럼프 2기는 한국에 대해 대중국 견제를 위한 역할 증대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압박은 경제와 군사적인 측면에서 동시에 진행될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을 중심으로 중국과의 탈동조화 정책을 강화하면서 대중국 수출 통제에 한국의 동참을 강하게 압박할 것이다. 또한,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요구할 개연성이 있다.
넷째, 관세와 대미 투자 문제도 도전 과제다. 트럼프 대통령의 고율의 관세 정책은 우리나라에도 예외 없이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산업 보조금 정책에 호응하기 위해 막대한 대미 투자를 한 우리의 관련 기업들이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변화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무엇보다 트럼프 2기 출범과 한국의 탄핵 사태를 계기로 ‘안보의 린치핀(linchpin)’인 한미동맹의 불확실성이 커진 점이 문제다. 72년 역사의 한미동맹은 한미 양국의 필요에 따라 동맹의 결속력이 유지되고 동맹의 수준도 높아졌지만, 크고 작은 갈등과 부침의 과정을 거쳤다. 윤 대통령 탄핵 사태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이 맞물린 2025년 상반기에 그 어느 때보다 한미동맹에서 불확실성이 고조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탄핵심판이 어떻게 결론이 나더라도 한미동맹의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문제는 우리나라 외교·안보 정책에서 시급히 해결할 과제로 남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탄핵심판 이후를 대비할 여유조차 없다. 당장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 통상 미국의 주요 대외정책은 새 정부 출범 후 6개월 이내에 그 방향성이 결정된다. 경로 의존성으로 한번 방향이 결정된 정책을 되돌리는 것은 쉽지 않다. 한미정상회담이 조기에 개최될 수 있다면 최선이겠지만, 탄핵 사태로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권한대행 체제에서 한미 정상회담의 기회를 잡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 한다.
첫째, 한미동맹의 가치와 역할을 트럼프 행정부에 알리기 위해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트럼프의 마가(MAGA: Make America Great Again)는 또 다른 마가(Make Alliance Great Again: 한미동맹을 다시 위대하게)를 통해 실현할 수 있다’라고 호소해야 한다. 정부와 기업, 국민 모두 힘을 합쳐 한미동맹의 가치를 미국 측에 알려야 한다.
둘째. 외교부를 중심으로 급한 불을 끄는 대응외교에 나서야 한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가능한 한 빨리 조태열 외교부 장관을 미국에 특사로 파견해야 한다.
셋째, 여야 정치권의 협치 자세다. 외교·안보 문제에 대해선 당리당략보다는 국익을 먼저 고려하는 초당적 협력을 통해 정부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만일 탄핵이 인용돼 조기 대선이 치러지더라도 국민은 외교·안보 현안에 협력한 정당에 더 높은 점수를 줄 것이다. 한미동맹은 정권의 성격과 관계없이 대한민국의 안보와 번영을 위해 유지 발전시켜야 할 구조적 자산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넷째, 정부는 패키지 거래에 대비한 전략과 계획을 수립해 놓아야 한다. 미국이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것과 우리가 미국에 원하는 것을 교환하는 ‘윈-윈 협상’ 전략을 세워야 한다. 반도체, 군함 제조능력 등 미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미국 측에 제공하면서 방위비 분담금 협상, 관세 협상, 대중국 견제, 북핵 문제 등에서 우리의 요구 사항을 얻어내야 한다.
다섯째, 유럽연합, 일본, 호주, 캐나다 등 다른 자유민주주의 국가들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 미국의 다른 동맹국들도 통상이나 방위비 분담 문제 등에 있어 우리와 유사한 과제를 안고 있는 만큼 이들 국가의 대미 협상 과정을 자세히 살피고 때에 따라서는 이들 국가와 협력할 필요가 있다.
정재용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연구위원(북한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