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한민국이 누리는 자유와 번영이 세계 10위권 수준이라는 평가에 우리는 전혀 거부감이 없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기준이나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기준은 물론이고 복지수준과 같은 사회적 기준, 나아가서 과학·기술 수준과 생활양식 등으로 드러나는 문화적 기준에서도 대한민국은 세계 최상위권 국가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번영의 기초는 언제 누가 놓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이승만이 주도한 대한민국이 1948년 출발하면서부터다. 전통 국가 조선이 자주 국가임을 말로만 주장하던 대한제국 시기도 아니었고, 한반도가 일본 제국의 일부였던 식민 시기도 아니었으며, 일본과 싸워 이겼지만 소련과 합작을 통해 신탁통치를 추진했던 미군정 시기도 아니었다.
투옥된 28세 청년 이승만 (1903년). 오른쪽은 그로부터 45년 후
자유민주국가 대한민국을 세워 대통령으로 취임한 73세 이승만 (1948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국가의 기본 운영 원리로 내세운 이승만이 1948년 국회, 헌법, 정부를 순차적으로 만들며 대한민국이란 새 나라를 세우면서부터였다. 같은 해 12월 이승만은 새로운 나라 대한민국의 주권을 UN을 통해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주도한 이승만 덕분에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어 오늘날 자유와 번영을 누리며 상위 10위권 국가로 도약했다.
건국 동력은 근대화·항일·반공 결합
한반도 남쪽에 1948년 새로이 등장한 나라 대한민국은 이승만 주도하에 3가지 동력을 발전의 발판으로 삼았다. 첫째는 전통 국가를 근대 국가로 탈바꿈시키고자 한 ‘근대화’ 의지다. 둘째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추구한 ‘항일’(抗日) 의지다. 셋째는 소련 공산 전체주의에 반대한 ‘반공’(反共) 의지다. 이 세 가지 동력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졌다면 오늘날 번영하는 대한민국은 결코 세워질 수 없었다.
근대화 의지가 없었다면 새 나라는 전통 왕조 국가로 회귀하는 복벽(復辟)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시대착오일 수밖에 없는 선택이다.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조선 왕조로 돌아가는 수단이었다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근대의 가치는 발을 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반공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북한과 같은 기괴한 공산주의 왕조 국가가 되었을 뿐이었다. ‘근대화 + 항일 + 반공’이라는 동력의 결합이 중요한 이유다.
<사진설명> 1917년 러시아에서 집권에 처음 성공한 공산주의 사상이 1945년 2차대전
이후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1948년 한반도 남쪽에서 이승만이
반공을 내세우며 자유민주 국가 대한민국을 건국한 사건은 그 자체로 세계사적 기적이었다.
잠시 역사를 되돌려보자. 항일의 결과로 1945년 해방이 되자 한반도에는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수면 위로 등장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의 스탈린은 남로당 박헌영과 북로당 김일성을 막후에서 조종하며 북한은 물론 남한까지도 적화시키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당시 남한을 통치하던 미군정은 공산주의라는 유령의 위험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오히려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며 이들이 실정법을 위반하지 않는 한 통제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소련이 점령한 북한에서 공산 전체주의 국가가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만들어지는 과정을 목격하면서도 미군정은 좌우합작을 통해 신탁통치를 추구하며 이를 비판하는 이승만을 견제했다. 이승만은 ‘고집불통 늙은이’라는 미군정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사진설명>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성립’ 경축대회 모습.
“(임시인민위원회는) 우리의 정부이다”라고 세로 현수막에 글귀가 씌여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동구에서의 좌우합작이 결국 소련 공산주의 위성국 건설을 위한 시간벌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1946년 6월 정읍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라도 우선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기만적인 이름을 가진 ‘임시인민위원회’라는 정부를 1946년 2월 출범시키고, 다음 달 3월에 들어서서는 토지개혁을 시행하며 공산국가 건설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구의 실패를 겪으며 다행히 미국이 정신을 차렸다. 2차 대전 이후 세계 곳곳에서 팽창하는 공산주의를 마주하며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1947년 3월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한 소련과의 냉전을 공식 선언했다. 이 선언이 한반도에서 구체화 되면서 미군정의 좌우합작은 비로소 동력을 잃었다. 동시에 반공을 내세운 이승만 노선이 국제질서의 흐름을 타게 되었다.
트루먼 독트린 힘입어 이승만 노선 본 궤도에 올라
소련과의 합작을 포기한 미국이 한국 문제를 UN으로 넘기자 국제사회는 마침내 1947년 11월 한반도에서 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을 결의했다. 공산주의 북한은 물론 이를 거부했다. 그냥 단순히 거부만 한 것이 아니었다. 1948년 5월 10일로 예정된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소련과 북한은 남로당과 좌익 계열을 총동원해 남한 전역에서 제주도 4·3 사건과 같은 살인, 방화, 파업, 폭동을 일으켰다.
동시에 소련과 북한은 ‘남북협상’이라는 이름의 기만전술까지 동원해 남한의 통일지상주의자들을 부추겼다.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장단에 춤을 췄다. 김구와 김규식이 대표적이다. 이승만의 반공은 바로 이와 같은 어려움을 내다보고 또 극복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므로 근대화 동력을 차치하고 나면 반공은 항일만큼이나 대한민국 건국에 중요한 동력이다.
건국 동력에서 반공을 지우고 항일만을 내세우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김원봉은 해방 전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 투쟁을 이끌며 임시정부 좌파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해방 후 남한으로 돌아온 그는 결국 북한으로 넘어가 노동상(노동부 장관)까지 맡으며 자유민주 국가 대한민국을 부정했다. 그는 끝내 6·25 남침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조력자 역할에 충실했다.
김구 역시 해방 전 독립을 향한 항일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한 인물이다. 기울어 가던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킨 김구는 해방되어 환국한 후 1947년까지 이승만과 더불어 반탁·반공 투쟁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948년 자유 대한민국 건국의 첫 단추인 5·10 선거를 거부하고 북의 공산 세력과 타협한다면서 결국 대한민국 건국 대열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반공을 뺀 항일만으로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고 가꿀 수 없는 사실은 김구와 김원봉의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자유대한민국 건설해
이 문제는 자유를 강조하는 윤석열 정부가 문재인 좌익 정권이 비틀어 놓은 국가 정체성 문제를 도마에 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반공이 항일에 자리를 뺏기는 순간, 레닌의 볼셰비키 공산당 정권에 충성한 홍범도는 물론 중공군과 북한군의 군가를 만들어 대한민국 안보를 위협한 정율성마저 대한민국이 기려야 하는 황당한 상황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반공을 뺀 항일만으로는 결코 오늘날 번영하는 대한민국을 만들 수 없다.
시·공간적인 기준 모두에서 1948년 한반도 남쪽의 대한민국 출발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대한민국은 한반도라는 공간에서 역사적인 시간을 거치며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통해 쌓아 올린 근대적 가치 위에 세워진 나라가 아니었다. 대부분 국민이 신분적 질서를 중시하는 중화사상에 머물고 있을 때 이승만이 주도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보편적 가치를 받아들이며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전통이라는 누적된 시간과 싸우며 이승만은 자유 대한민국을 건설했다.
동시에 대한민국은 같은 시간대에 공간적 연속성을 가진 가치 위에 세워진 나라도 아니었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유라시아 대륙은 동유럽부터 동아시아까지 공산주의라는 붉은 가치로 물들고 있었다. 그 넓고도 긴 공간의 끝자락 한 귀퉁이에 이승만은 자유민주 국가 대한민국을 세웠다. 공산주의자들의 문제를 내다보고 그들과 싸우며 그들을 막아선 이승만 덕택에 만들어진 기적이었다. 이승만 없었으면 대한민국도 없었다. 이승만에 감사해야 한다.
류석춘 연세대 정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