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초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었던 영화 중 하나가‘건국전쟁’이었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많은 영화인들은 건국전쟁의 흥행에 대해‘보수적 관점에서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성공할 수 없다’는 그간의 속설을 잠재운 일종의 영화계의 기적이라 평한다. 또한 이러한 기적에 더해, 영화의 엔딩 자막과 함께 전 관객의 박수가 터져 나오는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기억은 참으로 감동 그 자체였다. 대부분의 관객이 감동의 순간에 동참했던 이유는 그동안 대한민국 건국의 주인공인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오해와 폄하에 동조(?)한 미안함과 회한도 함께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한국자유총연맹 강석호 총재가 지난 3월 26일 '이승만 건국 정신 계승 국민대회'에서 "공산주의의 온갖 방해 공작에 맞서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 시켜준 자랑스러운 건국 대통령을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고 밝혔듯이 우리 필진 역시 반성과 미안한 마음을 담아 이승만과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대표적인 다섯 가지 주제에 대해 연속 기획 시리즈로 진실에 다가가고자 한다. - 편집자 주 -
① 이승만의 ‘정읍선언’, 한반도 분단의 원인인가 ? ② 대한민국은 ‘친일세력’이 득세한 나라인가 ? ③ 이승만은 과연 ‘친미 사대주의자’인가 ? ④ 이승만이 ‘런승만’이라고 ? ⑤ 대한민국 ‘건국일’ 논쟁, 이대로 좋은가 ? |
첫 번째 이야기 : 이승만의 ‘정읍선언’, 한반도 분단의 원인인가 ?
건국전쟁을 연출한 김덕영 감독이 영화제작 동기가 “이승만의 삶과 그가 살았던 시대에 무지했던 한 586세대의 통렬한 역사에 대한 반성이었다.”고 고백하였듯이 많은 국민들의 이승만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와 무지 중 하나가 이 일부 선동가들에 의해 덧씌워진 ‘이승만은 민족 분단의 원흉’이라는 것이며, 일부 국민들이 이에 동조(?)한 일면에는 이승만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로 악용한 일명 이승만의 ‘정읍선언’이 그 배경에 있다.
문제의 ‘정읍 선언’은 해방 직후 좌익 중심의 찬탁운동과 우익 중심의 반탁운동의 대결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1946년 6월 3일, 각지를 순회하는 도중 정읍에서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고 한 연설 중 일부 발언을 칭한다.
모름지기 모든 조직의 리더는 조직의 성공을 위해서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목표 달성을 위해 획득 가능한 모든 정보들을 기초로 정세를 분석한 후 부정적 요소들은 제거하거나 최소화하며 긍정적 요소들을 극대화하여 조직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 역시 이런 관점에서 발언의 문맥 자체를 분석해 보면 이승만이 추구한 분명한 목표는 ‘통일정부를 고대’한다고 밝혀듯이 ‘통일정부’였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통일정부 구성이 여의치 않음으로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세계공론에 호소’할 과도기적 수단으로 활용하자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함으로써 통일정부를 구성하자는 것이었다.
이승만 부정 세력들은 이승만이 권력에 취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이승만이 얼마나 통일정부를 고대하였는지는 그가 행한 연설이나 여러 행적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승만은 귀국한 후 환영대회에서 “우리는 하지 장군이 말한 대로 미군이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온 것인지, 아니면 한국이 분단되고 그 한쪽은 또 다른 주인 아래서 노예 신세가 될 것인지 알기를 원한다.”하여 미국이 결코 분단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와 함께, 북한이 소련의 지배권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곧 ‘노예 국가’가 될 것임을 설파하였다. 그 밖에도 이승만은 통일 정부 구성을 위해 스탈린에게도 전보를 보내 ‘자신이 원하는 정부는 통일 민주 정부’임을 밝혔고, 좌·우가 모두 참여하는 독립촉성 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남한의 이승만·김구, 북한의 조만식·김일성이 참석하는 4자 회담을 통해 통일정부의 구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통일정부’ 구성에 대한 기대와 희망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1945년 8월 21일부터 북한 지역에 대한 점령 활동을 시작하였고, 그 후 경의선과 경원선을 차단하였으며 남북으로 잇는 모든 도로를 폐쇄하였다. 그 후 9월 6일에는 38선 이남 지역과의 모든 통신선을 완전차단하고 우편물 교환을 금지함으로써 실질적인 분단 상황을 만들었다.
평양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청사에 걸린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 경축 현수막.
소련군은 이러한 일련의 조치에 이어 북한을 실질적인 위성 국가로 만들기 위한 그들의 계획을 치밀하게 추진해 나갔으며, 급기야 ’정읍 선언’이 있기 4 개월 전인 1946년 2월에는 김일성 을 위원장으로하는 ‘북조선 임시인민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 후 축하 단상의 전면에 '인민위원회는 우리 의 정부‘라는 현수막의 구호가 상징 하듯 10개 부처와 공안기관을 설치 하고,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 하 토지개혁을 하는 등 실질적인 정부 기능을 수행하였다.
또한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결과물 중 하나인 ’미소공동위원회‘는 좌우 대표자의 참석 범위를 놓고 갈등을 빚짐으로써 단 한 차례 개최되었을 뿐 더 이상의 어떤 진전도 없었다.
바로 이러한 일련의 상황이 모두 소련의 책략에 의한 것으로, 38도선 이북에 소련이 존재하는 한 통일정부 구성은 요원함을 간파한 이승만은 이의 해결책으로 그가 평소 소신으로 추진한 외교적 해법을 제안한 것이 정읍 선언의 진상이다.
이승만의 이런 구상은 이미 각국 정상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영국의 애틀리 수상에게 보낸 ’45년 8월 21일 자 편지에는 ”폴란드가 소련에 넘어간 것이 유럽의 안보에 위협이 됐던 것처럼, 한반도가 소련에 넘어간다면 동아시아는 공산화될 수 있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한반도의 독립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며, 같은 날 장개석과 트루먼에게도 소련의 음모에 동조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이승만은 일찍이 약소국가가 강대국을 대상으로 국가가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외교 독립’만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일관성있게 주장하였다. 또한 해방 전 독립운동을 추진하면서 국제회의 등에서 우리의 입장을 호소하여 지지를 획득하고자 하였으나 개인의 자격으로는 회의 참석조차 어려움을 이미 경험하였기에 한반도에서 우리가 염원하는 진정한 독립국가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인정하는 임시정부나 위원회 같은 존재가 시급히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특히 이승만의 이런 주장은 모스크바 3상 회의가 일어나기 전부터 “우선 각자의 노선이 어떻든지간에 독립부터해서 국제 사회에 합법적이고 승인된 정당한 발언권과 교섭권, 외교권을 가져서 한인들의 주권을 먼저 되찾아야 한다”는 취지로 행한 환국 직후의 기자회견 내용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글을 읽을 줄만 안다면 ‘정읍선언’ 어디에도 ‘단독정부’라는 용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정읍선언 이전에 이미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원 하 실질적인 정부가 들어섰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소위 학자이며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승만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역사적 사실을 모를리 없건만 왜 그들은 그토록 이승만을 ‘민족분단의 원흉’이라는 가시관을 씌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지, 그 의도를 파악하고 그들 주장의 허구성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정읍선언을 악용하여 이승만에게 ’민족분단의 책임‘을 뒤집어씌운 것은 당시 조선공산당의 “정읍에서 이승만 박사는 3상 결정을 반대함으로써 미소공위를 결렬시키고 반소·반공 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남조선 단독 정부를 세우려 하는 것”이라는 주장에서 시작되었다. 이를 받아 당시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 등 좌익 단체는 “반공 거두 이승만은 조급한 정권욕과 광포한 파쇼 이념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다시 이러한 폭언을 토한 것이다”라고 공격하였다. 조선공산당이 인정했듯 ’정읍선언‘의 핵심은 반소·반공이지 단독정부가 아니다. 아울러 민전의 표현처럼 ‘반공 거두 이승만’의 최대 관심사는 한반도에서의 공산주의의 확산 방지였다. 결국 이승만의 ’정읍선언‘의 핵심은 38도선 이북에 소련의 지배력이 존재하는 한 통일정부 수립은 불가함을 간파하고 이러한 암 덩어리를 제거하고 민족의 염원인 통일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했음이 분명한 팩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주장의 핵심인 반소·반공을 외면하고, 연설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남한 단독정부‘만을 왜곡 확대하여 국민을 오도하는 것은 다분이 이땅에 친소·친공의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가 아닐지 의심할 수 밖에 없으며, 소련 통제 하 공산정권이 남한 내에도 세워졌어야 했는데 이를 실현하지 못한 아쉬움(?)의 표현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이승만이 ’정읍선언‘에서 주장한대로 대한민국은 1948년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탄생하였다. 그리고 2년 후 1950년에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의 남침 야욕을 유엔군의 참전으로 대한민국을 지켜냄으로써 이승만의 정읍선언은 일부 현실화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이 분명히 밝혔듯이 우리의 최종목표는 한반도의 ’통일정부‘임을 고려 할 때 ‘정읍선언’에서 이승만이 제시한 ‘한반도 통일정부’를 향한 진정한 ‘건국전쟁’은 아직 진행 중이며, 그 기반은 기필코 ‘반 공산주의’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이종명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