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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통령 이승만 기획 시리즈 4.

네 번째 이야기 : 이승만이 '런승만'이라고?

선전 선동가들의 특징 중 하나가 ‘언어와 어휘 선택에 탁월하다’는 것이다. 이승만을 비난하는 사람들 역시 이런 특기의 소유자로 이승만에게 ‘분단의 원흉’ ‘친미 사대주의자’ ‘친일파’에 이어 ‘런승만’이라는 누명을 씌워 마치 대통령이 국민을 버리고 혼자 살자고 도망한 인물로 매도해 버렸다. 각박한 세상에 굳이 무엇이 진실인지를 알고자 하는 노력조차 버거운 사람들에게는 ‘런승만’이라는 별칭 하나로 이승만은 그런 인물이 되어 버렸다. 그들이 이승만을 비방하기 위해 지어낸 ‘런승만’이란 ①‘국민을 내버려두고 서울을 벗어나 피난했다’는 것과 ②‘자신은 피난을 가면서 국민들에게는 서울이 안전하다고 육성 방송을 했다’는 것, 그리고 ③‘한강 인도교 조기 폭파로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에게 씌워진 ‘런승만’의 누명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3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① 대통령이 서울을 떠나 피난 한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나?

 

각종 기록에 의하면 대통령이 북한의 남침을 처음으로 보고 받은 시간은 6월 25일 10시 30분 신성모 국방부 장관으로부터였다. 처음 대통령은 서울 고수를 고집했지만 일부 각료와 프란체스카 여사의 간곡한 권유로 27일 새벽 4시 피난을 시작하여 그날 11시 40분 대구에 도착한다. 피난 전 꼬박 이틀 밤을 샌 대통령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열차가 도착하여 눈을 뜨고서야 그곳이 대구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지하였다. 곧 자신의 결정을 후회한 대통령은 다시 서울 근교로 이동할 것을 지시하여 기차는 다시 북으로 향하였고, 이동 중 주변의 권유로 대전에서 전시 지휘 임무를 수행한다. 이승만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통령의 피신 시기와 장소를 시비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당시의 정황과 전쟁 지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대통령의 역할을 고려할 때 과연 그 비판이 타당한 것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시기와 관련하여, 북한군의 서울 진입이 28일 새벽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불과 하루 전 피신이 이루어진 것으로, 자칫 늦었다면 대통령이 적군에 체포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 만약 그런 상황이 현실화하였다면 체포된 대통령은 적의 심리전 수단으로 활용되었을 것이고 결국 국군의 사기 저하와 국민들의 저항 의지 마저 사라져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당시 ‘국회 서울 사수’를 결의하며 끝까지 서울에 남았던 60여 명의 국회의원은 절반이 피살되거나 납북되었다.(출처 : 세 번의 혁명과 이승만. 오정환 저. 413쪽)

또한 조선 시대 병자호란의 예에서도 국가수반의 피난 시기에 대한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청나라는 1차 조선 침략인 정묘호란(1627년) 시 공격이 지체되어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는 바람에 전쟁의 장기화가 불가피했던 교훈을 바탕으로 2차 침략인 병자호란(1636년) 때에는 기마병을 앞세워 단 15일 만에 한양에 도착하여 인조의 강화도 피신을 허용치 않았고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치욕적인 ‘삼배구고두’의 예를 표하며 항복하였다.

 

전시 대통령의 위치와 관련하여서도, 전쟁 지휘의 책임이 있는 대통령이 위험 지역을 벗어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처신으로 전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대통령은 국가수반인 동시에 국군의 통수권자로서 전쟁을 지휘할 의무를 지며, 국군 통수권자를 포함한 모든 지휘관은 유사시 가장 지휘가 용이한 최적의 장소를 선택하여 전쟁(전투)을 지휘함으로써 승리를 추구해야 한다. 때론 부하들의 사기(士氣) 진작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최전선에 위치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지휘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비교적 안전한 후방에 위치한다. 결국 전쟁 지도부를 포함하여 모든 제대의 지휘관이 위치해야 할 장소는 지휘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국 내에서 지휘가 불가능 할 경우 제3국에서 망명 정부를 운용하여 지휘의 연속성을 유지한다.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의 드골은 나치독일에 패배하여 자국 내에서의 지휘가 불가능해지자 영국으로 건너가 망명 정부를 운용하였다. 당시 드골은 미국으로부터 대표성을 인정받지도 못했고 심지어 무시까지 당하는 굴욕을 겪었지만 프랑스 국민은 그를 ‘런드골’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드골의 이름을 딴 수 많은 기념물과 건축물들이 있을 뿐 아니라 파리의 관문 국제공항의 이름도 ‘샤를드골 국제공항’이고, 파리의 중심부 개선문광장의 명칭도 ‘샤를드골-에뚜알’로 명명하여 영웅으로 떠 받든다.

 

이승만의 피난 시기와 장소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북한군의 위험이 불과 하루 전 거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군 통수권자가 그 시간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또한 김일성은 국군이 평양에 도착한 10월 19일 보다 일주일 앞선 10월 12일 평양을 빠져 나갔다고 알려져 있는데 왜 이에 대해서는 침묵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참고 : 한국전 연구가 박명림의 논문에 의하면“김일성은 인민군에게‘피로써 사수하라’는 명령을 남기고 본인은 조기에 평양을 탈출하였으며, 그의 모습은 전황이 역전되어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자 황망히 은신처를 찾아 떠나는 용렬한 패장의 모습”이었다고 밝히고 있음)

 

 

② 대통령이 ‘서울은 안전하다’고 육성 방송을 하고 홀로 피난을 갔다?

 

선동가들은 이승만의 피난 시기뿐 아니라 ‘서울시민들은 안심하고 서울을 사수하라’고 육성 방송을 함으로써 서울 시민들이 피난의 시기를 놓쳐 공산 치하에서 고생하도록 방치하였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당시 방송의 내용과 과정 등을 들여다보면 이 역시 왜곡된 주장임을 알 수 있다.

 

방송과 관련된 두 가지 논란은 27일에 있었던 국방부와 이승만 대통령의 육성 방송이다. 이중 국방부 방송은 오후 4시 라디오로 “국방군이 서울을 고수할 것이고 의정부를 탈환했다”는 요지였고, 오후 9시에는 대통령이 직접 “유엔과 미국에서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했다. 지금 공중과 해상으로 무기, 군수품을 날라와 우리를 돕기 시작했으니 국민들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으니 안심하라.”고 방송한 것이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무기나 장비와 같은 유형적 요소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의지와 단합과 같은 무형의 요소를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전쟁 지도부는 적의 무형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대적 심리전과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대내 심리전을 구상하고 시행한다. 이는 동서고금의 모든 전쟁에서 예외가 없었으며,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증명된 바 있다. 러시아는 전쟁 초반 전장 정보가 부족한 상황을 이용하여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수도로부터 도망갔다”, “우크라이나 수도가 함락 되었다”는 가짜뉴스를 퍼뜨리면서 우크라이나의 대항 의지를 좌절시키려 했다.

(출처 : 외교안보연구소 발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정보심리전의 평가와 함의, 2022.5.10.)

 

6·25 전쟁 당시 긴박한 상황 속에서 행한 국방부의 방송도 통상적으로 시행하는 아군의 사기 진작을 위한 선무(宣撫)방송이었지 서울 시민의 피난을 막기 위한 방송이 아니었다. 오후 9시 이승만의 육성 방송은 그 배경을 들여다 보면 방송의 의도가 더욱 명확하게 확인된다. 전쟁이 발발하자 대통령이 취한 조치 중 하나가 일본에 있는 맥아더에게 전쟁을 막지 못한 책임이 미국에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어서 한국을 구하라’고 강하게 항의한 것이고, 이어서 미국의 장면 대사에게 트루먼을 즉시 만나 미국이 약속한 ‘1천만 달러 무기지원’을 당장 시행토록 요구하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미국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에서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에 전폭적인 해·공군 지원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는 사실이 27일 오후 5시경 미국 주 한국공사(公使)의 전갈로 이승만에게 전해졌다. 미국의 즉각적인 지원을 전해들은 이승만은 상당히 고무된 상태였으며 방송을 통해 한시라도 빨리 국민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대전에서 육성 녹음을 했고 그날 저녁 라디오 전파를 타고 국민들에게 전해졌다. 이승만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방송 내용 중 대통령의 위치가 서울이 아닌 대전임을 밝히지 않은 것을 문제 삼는 것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당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떠나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대통령의 육성 방송이 서울 시민의 피난을 막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외면한 억지 주장일 뿐이다. 통상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 좋은 일이 있으면 가까운 사람들과 기쁜 소식을 한 시라도 빨리 나누고 싶어 하듯 당시 대통령의 마음 역시 미군의 지원이 곧 전개되어 전황을 극복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국민들과 함께 조속히 나누고 싶었던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의 발로였을 것이라 확신한다.

 

③ 한강 인도교 폭파의 진실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의 상판 중 2개가 국군의 폭발로 내려 앉았다. 이 폭발로 한 쪽 진영에서는 민간인이 적어도 800명 이상 사망했다고 주장하고, 다른 진영에서는 ‘희생자는 경찰 77명뿐이다’라고 반론을 제기한다. 이와 관련하여 양측 모두 스스로에게 유리한 증언과 정황 증거만을 선택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고 있다. 이처럼 각자 진영의 논리로 민간인 피해 유무를 주장하고 있지만 당시 정확한 조사도 이루어진 적이 없으며, 피해자의 유족임을 주장하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영향력있는 유투버는 당시 폭파책임자로서 사형에 처해졌던 최창식 대령의 재판에서 있었던 증언을 제시하며 사실인 양 주장한다. 그러나 최창식 대령은 훗날(1963년) 재심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고 복권되었기 때문에 그의 증언 역시 인정될 수 없으며 한편으론 허위일 가능성이 높다. 양측 주장의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정황상 폭파 직전 민간인 통제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사료되고, 그런 와중에도 일부 민간인은 진입을 시도했을 수도 있으며, 실제로 일부의 피해도 있었으리라는 것을 가정해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이를 마치 기정 사실화하는 것 자체도 논란이 될 수 있기에 무의미한 논란을 거듭하기 보다는 한강교 폭파가 당시 상황상 적절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군사작전 중 지상 작전은 크게 ‘방어작전’과 ‘공격작전’ 그리고 ‘지연작전’으로 분류한다. 이 중 지연작전이란 ‘일부 지역을 포기하면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작전’을 의미한다. 상대 전력에서 절대 열세였던 한국 전쟁 초기가 바로 이런 지연작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즉 우리 국군에게는 230여 대나 되는 적의 탱크를 정지시킬 어떤 효율적인 무기도 없었고,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적을 막기 위해서는 유엔군의 한반도 도착만이 유일한 해법이었으므로 이를 위해서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런 이유로 국방부는 한강교 폭파 시간을 ‘적의 탱크가 서울에 진입하기 2시간 전’으로 메뉴얼을 정해 놓았고, 실제 폭파도 이런 메뉴얼에 따라 적 전차가 서울에 진입한 28일 새벽 1시 이후인 2시 30분에 이루어졌다. 한강 인도교 폭파가 있었던 다음 날(29일) 한강 전선을 시찰한 맥아더도 극동 공군사령관(George E. Stratemeyer

중장)에게 남아있는 2개의 교량을 공중 폭격으로 ‘절단하라(Take them out)라고 명령할 정도로 적의 남하를 최대한 저지하는 일은 가장 시급한 현안이었다.

 

결국 한강 폭파로 북한군은 한강도하를 위해 6일을 지체하였고 조기에 남한을 석권하려는 계획에 차질을 가져왔으며, 이런 사실은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발간)에 그대로 담겨있다.

 

“적(국군)은 한강을 도하하고 교량을 폭파했으며, 남쪽 강변에 방어선을 조 직하여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늦추었다”며 북한군의 작전 미숙을 강하게 질타하였다.”

 

이승만을 ’런승만‘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통령의 ’피신‘을 ‘런(도망)’으로 희화화하면서, 어떻게든 부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려 선동한다. 대통령의 피신을 문제 삼는 것은 대통령이 적의 포로가 되더라도 서울에 남아 있었어야 한다는 것이니 그들의 비난 속에 숨겨져 있는 의도는 결과적으로 대통령이 적의 포로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 아닌가? 또한 대통령의 대 국민 사기(士氣)진작 방송을 왜곡 선전하고, 당시 상황이 시간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한강교의 절단이 불가피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인 학살로 포장하여 비난 하는 것 역시 한반도 적화 통일을 달성하지 못한 북한 정권의 아쉬움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런승만’과 같은 용어로 이승만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존재함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포기하지 않은 세력이 우리 곁에 함께하고 있다는 증거임을 명심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꿈꾸었던 자유민주주의의 대한민국을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선전 선동 차단에 한치의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다.

 

이종명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