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분명히 말하고자 합니다.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였 습니다. 발전의 역사였습니다. 기적의 역사였습니다.”
-이명박, 2008년 광복절 경축사-
“65년 전(1948년) 오늘은 외세의 도전과 안팎의 혼란을 물리치고 대한민국을 건국한 날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이 출범한 것이야말로 오늘의 번영과 미래 로 나아갈 수 있었던 첫 걸음이었습니다.”
-박근혜, 2013년 광복절 경축사-
”2년 후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보수나 진보 또는 정파의 시각을 넘어서 새로운 100년의 준비에 다 함께 동참 해 주실 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 문재인, 2017년 광복절 경축사 -
위 3명의 대통령 광복절 경축사가 대한민국 건국 시기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같은 나라, 같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을 1948년으로 규정한 반면, 문재인 대통령은 1919년을 건국의 기원으로 삼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1919년을 대한민국 건국의 해로 주장하는 측에서는 “대한민국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라고 명시된 헌법 전문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반면 1948년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임시정부 시절에는 국가의 성립요소인 ‘국민, 국토, 주권’이 없었기에 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 양진영 주장의 대표적 근거이다. 상반된 양측의 주장에 근거하여 시계 바늘을 70여 년 전으로 돌려 ① 제헌국회의 국호 및 연호 선정 과정, ② 임시정부 요인들의 건국에 대한 인식 등으로 진실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① 제헌국회의 국호 및 연호 선정 과정
국호 및 연호 선정 과정이 건국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임시정부를 국가로 인식하였다면 이런 논의 자체가 필요 없었을 것이기에 국호 및 연호를 선정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건국절’ 논쟁을 밝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 국호 선정
1948년 5·10 선거를 통해 구성된 제헌 국회의 당면한 긴급과제는 8월 15일까지 헌법을 제정하고 새 헌법에 따라 건국 과업을 완료한 후, 9월에 열리는 유엔총회에서 새 정부를 승인받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건국에 필요한 입법과제를 다룰 30인의 기초위원을 선출하고 헌법 제정에 돌입하였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라 이름이 정해지지 않아 우선 과제로 국호 선정 논의에 돌입하였다,
당시 국회 속기록에 의하면 어느 주제보다도 오랜 시간에 걸쳐 국호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열띤 토론 후 표결로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로 ‘대한민국’으로 확정되었다.
제헌 국회에서 ‘임시정부가 유일한 정권 수임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에는 많은 의원이 동의하였지만, 그렇다고 임시정부를 건국으로 인정하자는 것이 아니었으며, 국호 선정은 새로운 나라에 적합한 이름을 역사성과 용어의 적절성에 기초하여 검토하자는 것이 중론이었다.
요즘 젊은 부모들은 아이를 잉태하면 태명을 지어 부르고 아이가 태어나면 그때 비로소 본명을 지어준다고 한다. 1919년의 ‘대한민국’은 바로 태아의 이름이라 할 수 있고, 1948년의 ‘대한민국’은 새로 태어난 아이의 정식이름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태아의 이름과 탄생 후 이름이 동일하다고 하여 출생신고일을 태아가 잉태한 시점으로 할 수 없듯이, 1919년과 1948년의 정부의 이름이 동일하다고 하여 나라가 새로 탄생한 건국일을 1919년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울러 잉태한 날을 태어난 날로 여기지는 않지만 잉태의 순간부터 태아의 존엄성은 인정되어야 하듯이, 헌법 전문에 ‘법통을 계승한다’는 의미도 임시정부의 역사적 정통성과 당시의 역할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2) 연호 선정
연호란 원래 중국에서 군주가 자신의 치세연차(治世年次)에 붙이는 칭호였으나 점점 우리나라와 일본 등으로 확대되었으며, 한나라의 정체성과 관련된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때 단기(檀紀)를 주로 사용하였으나 임시정부 시절에는 ‘대한민국’과 ‘서기(西紀)’를 병기하였다. 그러다 1948년 제헌국회가 개원되어 새 나라에 새로운 연호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열띤 토론 끝에 ‘단기(檀紀)’로 결정하였다. 이런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식에서 ‘대한민국 30년’이라고 선서한 점을 들어 1919년을 건국으로 인정하였다고 주장하지만, 당시의 여러 정황으로 보아 북한과의 정통성 경쟁과 체제의 우월성을 의식한 정치적 수사라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대한’은 정통성이 우리에게 있다는 의미로, ‘민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담아 정통성이 결여되고 독재 체제인 북한과 차별화를 시도한 지극히 정치적 의미의 사용이었다.
당시 국회의원들이 임시정부를 국가라고 인정하였다면 국호와 마찬가지로 연호 선정 과정도 없었을 것이며, ‘단기’로 연호를 바꾸는 결정도 없었을 것이다.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연호를 포기하고, ‘단기’를 공식적으로 선택했다는 것은 1948년의 새 정부 수립을 ‘건국’이라고 인정한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인용된 ‘국회 속기록’은 ‘건국사 재인식’<이영일 저>에 수록된 내용을 재인용함
② 임시정부 요원들의 건국에 대한 인식
1919년을 대한민국 건국의 해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주된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이라고 항변하지만 어떤 문서나 기록에도 당시의 임시정부 요인들이 1919년에 나라가 건국되었다고 언급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임시정부 당시의 문서와 해방 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행적에서 건국을 준비하는 그들의 노력을 확인해 볼 수 있다.
(1) 대한민국 건국 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 (1941.11.28.)
대한민국 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은 1941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표한 새 민주국가의 건설을 위한 강령으로, 1948년 7월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에도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다. 강령에서는 광복 운동과 건국 과정을 3기로 나누어 각 단계별로 해야 할 일을 명시하였으며, 독립(광복) 후 새 나라의 건국을 위한 일종의 청사진(靑寫眞)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임시정부 요인들은 건국강령에 명시된 바와 같이 당시의 상황을 건국이 아닌 건국의 준비 과정이라고 인식했음이 명확하다.
(2) 김구의 성명 (국내외동포에 고함)(1945년 9월3일)
1945년 9월 3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김구”명의로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위 <고함>의 파랗게 표시된 호소문에 당시 김구의 상황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우리가 처한 현 계단(단계)은 건국강령에 명시한 바와 같이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하는 과도적 계단(단계)이다. 다시 말하면 복국의 임무를 아직 완 전히 끝내지 못하고 건국의 초기가 개시되려는 계단(단계)이다.”
(3) ‘건국 실천 양성소’ 설립(1947년 3월)
‘건국실천양성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가 1947년 국가 건설을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설립한 단체이다. 이 단체는 김구의 자주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제정하여 공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설립 당시의 명예 소장은 이승만, 소장은 김구였으며, 남아있는 기념 표지판이 당시의 상황인식을 대변한다.
이상의 사례 외에도 해방 후 가장 먼저 조직된 단체가 ‘건국준비 위원회(건준)’였다. 또한 임시정부는 어떤 국가나 국제 단체로부터도 국가로 인정받은 적이 없지만 1948년의 대한민국은 유엔에서 최초로 국가로 승인 받았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건국일이 1945년 8월 15일이라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1919년을 건국의 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된 논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헌법 전문을 근거로 들고 있지만, 살펴본 바와 같이 정작 임시정부 요인들은 어느 누구도 당시(1919년)의 상황을 건국으로 여긴 사람이 없다. 아울러 제헌 국회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출신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국회 속기록 등에서 확인 할 수 있다. 특히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김구마저도 해방 전후의 상황을 건국의 준비기간이라고 여겼음이 여러 행적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임시정부 요원들이 당시의 상황을 건국으로 인식한 것처럼 오도(誤導)하며 1919년을 건국의 해로 규정하려는 의도에 대해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혹시(아니기를 바라지만) 1919년을 건국의 해로 규정하여 공산주의자 사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거나 훗날 북한 정권에 참여한 김원봉 같은 공산주의자들도 모두 건국의 공신으로 떠받들려고 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대한민국의 의사결정권자들이 자칫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로 채워진다면 김일성을 포함한 북한 정권 창출에 기여한 인물들에게도 대한민국 건국을 기리는 훈장이 수여되는 장면을 바라만 보아야 하는 상황이 현실화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1919년 건국 주장의 진정성을 인정받으려면, 김일성을 국가 시조로 헌법에 명시하고 9월 9일(구구절)을 정권 수립일로 기념하는 북한에게도 똑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연재를 마무리하며......
혹자는 대한민국에서는 영웅이 탄생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면 이런 하소연이 틀린 것 같지 않다. 대한민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광화문과 대한민국 사람들이 매일 사용하는 지폐(紙幣)에도 조선의 영웅은 있어도 대한민국의 영웅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조선 조정의 무능을 이야기하면 ‘식민사관‘으로 매도당하고, 대한민국보다는 북조선에 편향된 사고로 사리를 판단하고 때론 선전 선동에 앞장선다. 대한민국의 영웅이 사라진 현실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조장한 정치·사회적 환경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위기의식과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차질 없이 추진하는 등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왜곡되지 않도록 적극 대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울러 이승만 평가에 있어 냉정함을 잊어서도 안된다. 이승만 말년의 정치적 잘못을 대통령의 책임이 아니라 주변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언행은 결코 이승만 평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흔히 이승만의 업적을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과오에 대한 이승만의 책임을 인정하고, 한편으론 예나 지금이나 독재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는 여느 국가의 지도자와는 달리 스스로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이승만의 진심이 왜곡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은 하늘이 낸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대한민국 애국가의 구절 중 ‘하느님이 보우하사 대한민국 만세’를 읊다 보면 가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생각하게 된다. 그 어려운 시기, 탁월한 선택으로 오늘의 풍요와 자유를 보장해 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그야말로 우리에겐 하늘의 내려준 선물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폄하와 비난이 지속되고 있고, 그들의 주장이 북한과 그 추종 세력들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는 현실은 우리의 할 일이 이승만의 건국 당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 사명은 곧 북한과 그 추종 세력들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한반도 공산화를 저지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이 땅에서 더욱 공고히 하는 것임을 되새긴다.
-이 종 명 교 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