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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정신

 

자유의 혁명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세계만방을 향해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날의 경축식에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이 새로운 나라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민주정체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국민이나 정부는 항상 주의해서 개인의 언론, 집회, 종교, 사상의 자유를 극력 보호해야 한다고 하였다. 뒤이어 그는 지난 40년을 회고하면서 우리는 전체주의 국가 일본의 억압하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각이 자유롭지 못했지만,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쉬지 않고 싸워서 결국 오늘의 영광을 맛보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독립운동을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독립운동에 종사한 여러분의 대답은 각기 상이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일본은 우리의 원수이며, 이에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것은 아무래도 참을 수 없는 굴욕이기에 독립운동을 한다고 할 것이다. 실제 많은 운동가들이 그러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조국의 나아가 아시아의 공산혁명을 위해 독립운동을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승만처럼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독립운동가는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중 대국민 방송이나 담화에서 여러 차례 자신의 인생을 혁명가 50년이라고 회고하였다. 그가 그의 조국을 자유인의 나라로 바꾸겠다고, 곧 그러한 혁명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배재학당 시절인 1896년경이다. 최초의 투쟁 대상은 전제국가 대한제국이었다. 이승만의 회고에 의하면 그것은 희망이 없는 투쟁이었다. 그는 결국 중대 국사범으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5년 7개월이나 갇히고 말았다.

나라가 망하자 그의 투쟁 대상은 일본 제국주의로 바뀌었다. 그는 어느 약소민족이 독립을 이루기 위해선 우선 문명의 실력을 길러서 국제사회로부터 독립의 자격을 인정받는 가운데 강대국끼리 전쟁을 할 때 어느 강대국의 도움을 받아 그 전쟁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1908년 그는 장차 태평양의 제해권을 두고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한 국제정세의 호기가 도래할 때까지 우리는 실력을 길러 우리의 대포와 비행기로 그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러한 이승만의 예언과 주장을 외세 의존의 허무주의라고 비웃었다. 그들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외면하는 미국에 실망하고 소련으로 도움의 눈길을 돌렸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끝내 미국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미국은 자유의 나라이며, 자유의 정신은 선량하고 정의로우며, 이에 미국의 정치는 결국 이 같은 정신에 입각하여 약소 민족을 제국주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하고 세계를 자유통상과 민주주의의 질서로 이끌어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었다. 자유 이념의 철학, 역사, 정치학, 경제학이었다. 이 같은 이승만의 예언과 기대는 불과 33년 뒤인 1941년에 미국과 일본이 전쟁에 돌입하고, 1945년 미국이 일본 제국을 해체한 다음 그의 군대를 한반도의 남부에 상륙시킴으로써 현실화하였다. 그 이념과 노선이 세계사의 주류와 일치함으로써 과학성과 실천성을 담보한 독립운동가는 이승만이 유일하였다. 필자는 달리 누가 있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공산주의의 위험성

오늘날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그 날에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끝난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만큼 잘못된 역사 인식도 없을 터이다. 독립운동은 주권 국가를 회복하거나 건설하는 일을 말하며,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의 독립운동이 종결되는 것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지막 3년간이야말로 그간의 독립운동이 도달한 최후의 무대였다. 이 무대에 올라 독립운동가들은 그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고 그 이념과 학식의 진정한 얼굴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결국 북한으로 올라갔다. 중국에서 돌아온 민족주의자들은 둘로 나뉘었다. 한 무리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했으나 다른 한 무리는 참여를 거부하면서 끝내 대한민국을 부정하였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이 이 독립운동의 최후의 무대에서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념과 대응이 다른 누구보다 올바르고 현실적이기 때문이었다. 그 3년간 그는 한 번도 좌고우면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자유민주의 국가를 세우겠다는 그의 확고한 지향은 강력한 반공산주의 노선으로 나타났다.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국과 소련은 좌우합작의 임시정부를 세운 다음 이를 5년간 신탁통치할 방침이었다. 이승만은 그에 저항하였다. 좌우합작은 지옥으로 가는 선의로 포장된 길이었다. 2차 대전 후 동유럽의 여러 국가가 좌우합작의 길에 들어섰다가 공산주의 체제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승만에게 좌우합작을 받아들이라는 미군정의 압력은 한국인의 지배자를 일본에서 소련으로 바꾸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23년에 쓴 “공산당의 옳고 그름”이란 글에서 공산당이 주장하는 평등주의에 대해선 자기도 찬성이지만, 공산당의 주장대로 사유재산과 종교를 폐지한다면 문명의 진보가 중단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후 소련에서 전개되는 공산주의의 비참한 현실을 전해 들으면서, 또는 2차 대전 당시 소련이 점령지에서 저지른 반인도적 만행의 기사를 접하면서 그의 반공산주의는 확고한 신심으로 굳어져 갔다.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갈 길을 몰라 헤매는 그의 동포를 향해 외쳤다.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 공산주의자는 양의 무리에 섞인 이리와 같다. 여러분의 동생이 이미 훈련받은 공산주의자라면 그는 더 이상 여러분의 가족이 아니다. 몸에 병이 들었으면 우선 병들지 않은 반쪽의 건강을 지킨 다음, 나머지 반쪽의 건강을 회복할 일이다.

그의 이 같은 단순명료한 주장에 남한의 대다수 한국인이 귀를 기울이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미군정의 몇 차례 여론 조사가 명확히 하듯이 당시 남한 주민 가운데 진성의 공산주의자는 10%를 넘지 않았다. 이른바 중도좌파를 포함해도 그 비중은 25%를 넘지 않았다. 1946년 4∼6월 이승만은 남한의 여러 지역을 순방하였다. 가는 곳곳마다 수만 명의 군중이 몇 시간 전부터 그를 기다렸다가 그의 연설에 환호하였다. 가는 곳곳마다 이승만을 국부로 환영하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그것이 민심이요 곧 천심이었다. 이승만이 조직한 독립촉성국민회의 회원 수는 500만을 넘었다.

그 이승만을 미군정은 어찌할 수 없었다. 미국은 후진 지역의 정치체제는 주민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야 한다는 원칙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나라이다. 그런 미국군이 38도 이남에 상륙한 것은 거기에 사는 한국인에겐 더없이 큰 행운이었다. 반면 소련군이 들어온 38도 이북의 사정은 달랐다. 신탁통치에 반대한 조선민주당의 조만식은 소련군에 의해 연금되었다가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문명의 개조를 위하여

이상과 같이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정신은 자유민주주의요, 그것의 다른 표현인 반공산주의였다. 그것만이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통 문명의 개조를 지향하였다. 생각해 보자.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이 제정되고, 그 헌법에 따라 자유·보통·비밀 선거가 실시되고, 그 선거에 의해 국민의 대표로서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선출되면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인가. 그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제도로서 형식에 불과하다. 만약 어느 사회의 구성원들이 개인의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여전히 전통적인 종족·친족 관념이나 신분 차별에 강하게 얽매여 있다고 치자. 그런 사회에 어떤 식으로든 자유민주의 제도가 성립했다고 치자. 그로 인해 큰 혼란이 발생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체제가 무너지고 말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실제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수많은 후진국의 민주주의가 그러한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건국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새로운 나라의 이념으로서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제창하였다. ‘일민’은 자유 이념으로 하나가 된 국민이란 뜻이다. 한국인이 그러한 선진 국민으로 발전해 가기 위해 일민주의가 제시한 네 가지 강령은 다음과 같다. 제1강령은 “문벌을 혁파하고 반상의 구별을 없애자”는 것이고, 제2강령은 “빈자와 부자가 동등한 권리와 복리를 누리게 하자”는 것이고, 제3강령은 “남녀동등은 민주주의의 큰 정강”이니 남녀동등을 실현하자는 것이고, 제4강령은 “지방색을 타파하자”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1948년 새로운 나라가 건립되었지만, 사회와 문화는 여전히 조선시대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1910년 조선왕조가 망한 지 불과 38년 만이었다. 조선왕조가 남긴 신분 차별, 여성 차별, 지역 차별의 문화는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개인의 자유와 독립보다는 가족과 친족의 생존과 번영을 생애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추구하는 한국인의 행동 양식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종래 심하게 오해되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제창한 일민주의는 우리의 전통 문명을 자유민주주의에 걸맞는 형태와 수준으로 개조하자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76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국의 사회와 문화는 많이도 발전하였다. 그렇지만 일민주의의 네 강령에 비출 때 여전히 부족하고 미숙한 면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정신은 흘러간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역사의 길라잡이다.

 

이영훈 이승만 학당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