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대 미국 대통령 선거가 5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민주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11월 5일(현지 시각) 세계에서 가장 힘센 선출직을 놓고 격돌한다. 세계 패권국이자 자유민주주의 지도국인 미국의 대선은 4년 주기로 진행되는 지구적 이벤트다. 미 대선은 국제질서와 안보, 세계 경제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미 대선이 몰고 올 파장에서 벗어날 국가는 지구상에 없다. 대한민국을 비롯해 유럽연합(EU), 일본, 호주, 캐나다 등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물론 중국, 러시아, 북한 등 권위주의 국가들도 미 대선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국 유권자들과 세계인들은 9월 10일(현지 시각) 해리스와 트럼프의 첫 TV토론을 숨죽이며 지켜봤다. 토론은 해리스의 판정승이었지만, 판세를 뒤흔들 결정적 한 방은 없었다.
여전히 판세는 초박빙이며, 유동적이다. 트럼프와 해리스 누구도 절대적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미 대선을 예측하기 어려운 이유는 복합적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낙마에 따른 민주당의 후보 교체, 당파적 양극화의 심화, 간선제 방식으로 치러지는 미국의 선거 제도가 맞물려 있다. 미 대선전은 전·현직 대통령 간 리턴매치로 전개되다 81세 고령인 바이든이 TV토론 참패로 7월 21일 사퇴하면서 재편됐다. 갑작스럽게 대결 구도가 바뀐 탓에 판세는 아직 굳어지지 않았다. 둘째, 임계점에 도달한 미국의 당파적 양극화도 선거 결과 예측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민주당 버락 오바마와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건 공화당 트럼프의 집권기를 거치면서 당파적 양극화는 고조됐다. 민주당과 공화당 간 당파적 양극화는 선거 경쟁의 수준을 넘어 이데올로기, 인종, 종교와 결합한 국민 정체성의 양극화 차원으로 심화했다. 현재 미국의 유권자들은 서로 타협하기 힘든 국민 정체성을 둘러싸고 ‘영혼의 쟁투’를 하는 중이다. 당파적 양극화의 심화에 따른 지지층의 결집 효과로 양당 대선후보의 지지율도 덩달아 초박빙이 된 것이다. 선거 결과 예측을 어렵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대통령 선거인단 통한 간선제 방식의 선거 제도에 있다.
※ 출처 ; 270toWin
미국 대선에선 전체 538명의 선거인단 가운데 과반인 270명을 확보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538명이라는 숫자는 연방 상원의원(100명), 연방 하원의원(435명)과 수도 워싱턴 D.C에 할당된 선거인단(3명)을 합친 것이다. 상원의원은 주의 크기나 인구와 관계없이 주별로 2명씩 선출한다. 반면 하원의원 수는 인구수에 비례해 배정된다. 따라서 선거인단 538명은 대체로 각 주의 인구에 비례해 할당된다. 50개 주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은 캘리포니아주에는 54명의 선거인단이, 인구가 가장 작은 와이오밍주에는 3명의 선거인단이 할당됐다. 네브래스카주(5명)와 메인주(4명)를 제외하고 48개 주와 워싱턴 D.C에서는 배정된 선거인단 전부를 승리 후보에게 몰아주는 승자독식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런 미국 특유의 선거 제도로 인해 전국 단위에서 최다 득표율을 기록한 후보가 대선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 50개 주 가운데 대다수 주는 선거전부터 우세 정당이 뚜렷하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호남은 더불어민주당이, 영남은 국민의힘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는 현상과 유사하다. 선거인단이 가장 많이 배정된 캘리포니아주(54명)는 민주당이, 남부 최대주인 텍사스주(40명)는 공화당의 승리가 확실하다. 결국, 미 대선은 공화, 민주 양당의 지지율이 엇비슷한 10개 미만의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s)’로 불리는 경합 주에서 결판난다. 경합 주는 대선 때마다 조금씩 바뀐다. 올해 대선의 경합 주는 7곳이며, 이들 주에는 총 93명의 선거인단이 할당됐다. 북동부 러스트벨트(Rust belt) 지역의 펜실베이니아(19명), 미시간(16명), 위스콘신(10명)과 남부 선벨트(Sun belt) 지역의 조지아(16명), 노스캐롤라이나(16명), 애리조나(11명), 네바다(6명) 등 모두 7곳이다.
판세는 여전히 초박빙이다. 해리스가 후보 교체 후 한동안 허니문 효과로 상승세를 타다 9월 들어 승부는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왔다. TV토론에서 선전한 해리스가 다소 유리한 입장이지만 판세는 여전히 유동적이다. 로이터와 입소스가 TV토론 직후 실시한 전국 단위 조사에서 해리스는 47%대 42%로 트럼프에 5%포인트 앞섰다. 앞서 CBS가 유고브와 공동으로 9월 3∼6일 실시한 러스트벨트 경합 주 3곳 여론조사에서는 해리스가 미시간(50% 대 49%)과 위스콘신(51% 대 49%)에서 근소하게 리드했지만, 최대 승부처인 펜실베이니아에서는 각각 50%로 동률이었다. 선벨트 4개 주의 지지율도 우열을 가리기 힘든 상황이다.
경합 주에서 두 후보의 지지율이 이처럼 붙어있는 상황에서 승자를 예단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 해리스와 트럼프의 승리 시 각각 예상되는 외교·안보 환경 시나리오를 점검하고 대비책을 세우는 게 현명한 접근법이다. 두 후보의 대외정책을 대중국 정책, 한미동맹, 대북정책 등 분야별로 점검하고 촘촘한 대응책을 수립해야 한다. 먼저 미국의 차기 행정부에서 대외정책 근간인 대중국 정책이 어떻게 전개될지 전망해 보자. 두 후보 가운데 누가 백악관을 차지하더라도 미국의 ‘중국 때리기’는 이어질 것이다.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고 미국의 패권을 지키는 것을 대외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다만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힘에 의한 평화’를 앞세운 트럼프는 군사력 강화를 통해 대중국 견제와 봉쇄, 중국-러시아-북한-이란으로 연결되는 권위주의 국가들의 연대 차단이라는 군사 안보 정책 목표를 달성하려 할 것이다. 트럼프는 강대국 정치와 양자주의 접근법을 선호한다. 반면 해리스는 동맹 네트워크를 활용해 중국에 대응하고 권위주의 국가 간 협력을 차단하는 바이든의 대외정책 기조를 계승할 것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한미동맹, 미·일 동맹, 한미일 3국 안보협력 체제, 미국, 영국, 호주 안보협의체인 오커스(AUKUS) 등 동맹 네트워크를 중시할 것이다. 해리스는 강대국 정치보다는 미국의 이익과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미국의 대전략(Grand Strategy)을 선호한다. 미국의 차기 행정부는 경제·통상 분야에서도 대중국 봉쇄 정책을 이어갈 것이다. 다만 두 후보는 방법론만 다르다. 트럼프는 관세를, 해리스는 기술 통제를 통해 중국을 견제할 것이다. ‘관세 대통령’을 공언한 트럼프는 10%의 보편 관세를 도입하고, 중국산 수입품에 대해선 최대 60%의 관세를 부과하는 카드를 준비 중이다. 해리스는 반도체를 비롯한 핵심 기술과 물자의 대중국 수출을 강력히 통제하는 정책을 이어갈 것이다. 해리스 정부의 대중국 기술 통제는 동맹국에도 적용될 것이다.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한국은 차기 미 대통령의 대중국 정책 기조에 보조를 맞추는 게 불가피하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양다리 걸치기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미·중 전략경쟁 여파로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하지 않도록 상황을 관리할 필요는 있다.
무엇보다 주시할 문제는 미 차기 행정부의 한미동맹과 대북정책이다. 해리스가 집권할 경우 한미동맹과 대북정책은 바이든 행정부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해리스는 작년 4월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시 “한미동맹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들을 선도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민주당은 8월 해리스를 대선후보로 확정한 전당대회에서 발표한 정강 정책에서도 동맹 중시 정책을 분명히 했다. 게리 세이모어 전 백악관 대량살상무기 조정관도 최근 미국의소리(VOA) 인터뷰에서 “(해리스 정부에서) 한국에 대한 확장억제와 한미일 3국 협력 강화로 북·중·러의 위협에 공동 대응하는 바이든의 정책 기조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따라서 우리도 한미동맹 및 한미일 삼각 협력 강화를 주축으로 한 외교·안보 정책 기조를 유지하면 큰 무리가 없다. 최대 안보 현안인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해서도 미국의 확장 억제력과 우리의 재래식 전략을 결합해 대응하는 기조를 유지하면 된다. 하지만 동맹 네트워크보다 강대국 정치와 양자 협상을 중시하는 트럼프가 귀환하면 한미동맹과 대북정책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당장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를 것이다. 트럼프가 주한미군 방위 분담금의 대폭 인상을 요구한다면 어느 수준까지 수용할 것인지에 대한 정교한 가이드라인을 수립해 놓아야 한다. 트럼프는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대북 협상이나 주한미국 방위비 증액 요구용 카드로 꺼낼 가능성도 없지 않다. 트럼프는 지난 4월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질문에 “왜 우리가 부유한 나라인 한국을 대신 방어해야 하는가?”라고 답한 바 있다. 트럼프는 1기 때와 마찬가지로 북한 김정은과 직접 대화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트럼프는 북한의 비핵화를 추구하기보다는 북핵 동결 또는 감축과 대북 제재 해제를 교환하는 것을 정책 목표로 삼을 수 있다. 만일 북미 간 이런 합의가 실제로 이뤄진다면 이는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이어서 엄청난 후폭풍이 일 것이다. 한미동맹의 균열로 심각한 안보 위기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 미국의 확장억제 정책에 대한 회의론이 증폭되면서 자체 핵무장을 요구하는 우리 국민의 목소리가 거세질 것이다. 현재도 안보 전문가들과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자체 핵무장론이 제기되고 있는데, 트럼프 재집권은 이 담론을 강하게 추동할 것이다. 트럼프가 귀환하게 되면 주한미군 주둔과 한국에 대한 확장억제 제공을 골자로 한 안보 공약을 준수하고 북한과의 일방적인 대화에 나서지 않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트럼프와 김정은 간 직접 대화 가능성에 대비한 플랜B도 수립해 놓을 필요가 있다.
미 대선은 우리 안보 환경에서 결정적 변곡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 정부는 해리스와 트럼프 승리 시에 대비한 각각의 안보 환경 시나리오를 분야별로 면밀하게 점검한 뒤 최적의 대응책을 찾아야 한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번영을 갈구하는 우리 국민도 미국 대선에 따른 안보 환경 변화를 자신과는 무관한 일로 여기지 말고, 정부가 올바른 대응책을 세울 수 있도록 조언과 비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정재용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연구위원(전 연합뉴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