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이야기 : 기억해야 할 대한민국의 전쟁영웅들
희망없이 살아가던 어떤 이에게 누군가 던진 희망의 메세지가 삶의 활력소가 되어 주기도 하고, 늘 기죽어 있던 어느 학생을 향한 선생님의 칭찬과 용기를 북돋우는 한마디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도 하며, 패배 직전에 몰렸던 운동선수들에게 코치의 독려는 승부를 뒤집는 기적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또한 국가지도자의 한마디 역시 국민들의 의지를 결집시켜 상상 이상의 결과를 창출하기도 하며, 늘 죽음의 공포 속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전장에서의 장병들에게 지휘관의 한마디는 투혼을 불러일으켜 절대 열세였던 전장의 상황을 한 순간에 반전시키기도한다,
①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쏴라”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 사단장이 부하들에게 던진 이 한마디는 다부동이라는 한 지역의 전투 승리에 머문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지켜낸 결의에 찬 지휘관의 절규(?)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한 마디가 죽음의 전선에서 지휘관들이 할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진두지휘의 한 전형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다부동 전투의 승리는 단순한 한 지역에서의 승리를 넘어 전 한반도를 공산화의 위기에서 구출한 역사적 전투라는 특수성 때문에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신의주 - 평양 - 서울 – 대전 - 대구 – 부산으로 연결되는 이른바 ‘한반도 전쟁 축선’은 속전속결로 한반도 적화를 꿈꾸었던 김일성이 가장 선호하는 기동로였다. 김일성은 이 축선을 점령하면 조기에 한반도 적화 야욕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이 축선을 따라 8월 15일 이전 부산을 점령하기 위한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한강교의 조기 폭파로 한강 이북에서 진출이 지연되었고, 미군 24사단 선발대인 스미스 대대의 출현과 24사단 본대의 대전 저항, 그리고 곳곳에서 벌어진 국군의 분전으로 여러 가지 차질을 빚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김일성은 8월 15일 이전까지 부산을 점령하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대구 점령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김일성이 8월 15일이라는 날짜에 집착한 것은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된 8월 15일의 상징성을 고려하여 한반도 적화를 해방 전쟁으로 선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북한군 포로 심문 중에서 확인된 내용임)
반면 후퇴를 거듭하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방어선으로 낙동강을 선택하고, 그곳에서 약 1개월 반 동안 결사적인 전투를 전개한다. 낙동강 방어선은 남해안의 마산으로부터 북쪽으로 낙동강을 따라 낙동리까지 이르고, 여기서부터 동해안까지 산악지대를 연결하는 선으로 이루어졌다. 이중 낙동강을 연한 개활지는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우세한 미군이, 산악지대에는 한국군이 배치되었다. (당시 한국군이 배치된 방어선은 X선, 미군이 배치된 방어선은 Y선,으로 명명하였음.)
한국군은 5개 사단을 X선의 전면에 배치하였고 이중 백선엽이 지휘하는 1사단은 대구로 이르는 최단 접근로를 담당하기 위해 가장 서쪽에 배치되어 미군과 어깨(군사용어로 ‘전투지경선’)을 나란히 하였다. 아마도 백선엽의 1사단을 미군과의 경계 지점에 배치한 것은 사단장의 미군과의 언어 소통 능력과 한미 연합 작전 수행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지형과 부대의 전투력을 고려하여 한국군과 미군의 책임지역을 설정하여 배치하였으나, 전장에서의 전투 장소와 시간은 공격하는 자가 선택하는 것으로, 김일성은 대구에 이르는 최단 접근로를 지키고 있는 1사단 정면으로 3개 사단을 집중 투입하였다. 북한군의 공세가 1사단 정면으로 집중되자 미8군 사령관(윌튼 워커 중장)은 미군의 2개 연대를 한국군의 1사단 책임지역으로 증원하여 1사단과 함께 인민군을 막아내도록 조정하였다.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은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는 미군과의 전투를 회피하고 한국군 1사단이 담당하던 다부동 지역으로 전투력을 집중하였고, 중과부적이었던 1사단은 북한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백선엽 사단장은 1사단의 후퇴로 인해 측방이 노출된 미군으로부터 “한국군이 물러나면 우리(미군)도 물러날 수 밖에 없다”는 강력한 항의를 받게 된다.
당시 모든 부대가 그러하였지만 1사단 역시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뿔뿔이 흩어졌던 장병들을 모아 새롭게 편성된 부대로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할 여건도 갖추지 못했으며, 창군 후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라 군대의 훈련 수준도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미군은 그 많은 지원에도 불구하고 모택동 군대에 패한 장개석 군대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로 한국군의 전투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백선엽 사단장은 미군 항의의 심각성과 1사단이 담당하던 전선이 무너지면 대구는 곧장 적의 수중에 들어갈 수 밖에 없다는 절박함에 최전선으로 달려가 후퇴하는 장병들과 만나 결전을 독려한다.
“지금 우리는 대구와 부산만을 남긴 상태다. 이곳을 지키지 못해 대구를 내준다면 우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바다에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여러분 모두 그동안 잘 싸워줘서 정말 고맙다. 그러나 한 번 더 힘을 내자. 저 밑 계곡에서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는 중이다. 우리가 먼저 물러나면 저들(미군)은 곧장 철수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 대한민국은 망한다. 내가 먼저 앞장을 설 테니 나를 따라와라. 그러다가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쏴라.” (출처 : 백선엽의 6.25전쟁 징비록)
이 말을 마친 사단장은 권총을 빼 들고 가장 앞장서서 원래의 전선으로 발길을 향했고 모든 장병들은 사단장을 따랐으며, 국군이 다시 나타나자 인민군은 국군의 증원군이 온 것으로 착각하고 후퇴함으로써 다시 전선을 원상태로 회복시켰다. 전선의 회복은 미군의 철수를 막았고 한국군에 대한 미군의 불신을 가라앉힐 수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다부동의 사수는 인민군의 대구 진출을 저지하였다.
다부동 전투에서 또 하나 괄목할 성과는 적 전차에 대한 두려움을 씻어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신속하게 대구로 진출하기 위해 소련으로부터 추가로 지원받은 다수의 T-34 전차를 다부동 지역으로 집중 투입하였으나, 국군은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은 3.5인치 로켓포로 다수의 적 전차를 처음으로 파괴시켜 자신감을 회복하였고, 미군과 함께 최초로 전차전을 수행함으로써 적에게 심대한 피해를 입혔다.
결국 다부동 전투의 승리는 낙동강 방어선을 계속 유지시켜 인천상륙작전 등 반격 작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고, 북한군에 대한 상당한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며,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동력을 제공하였다.
② “뼈 한 조각 머리털 한 올이라도....”
필자는 오랜 군 생활 동안 6.25 전사자의 유해를 발굴하는 사업을 3회에 결쳐 경험하였다. 휴전 후 반세기도 훌쩍 지난 현시점에서 6.25 전사자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당시의 전투에 참전하였거나 주변에 거주하면서 그 참상을 목격한 분들의 증언이 중요하다. 필자의 경험 중 2회는 국국과 북한군의 격전지였으며, 1회는 미군과 북한군이 맞붙은 금강지역(지금의 세종시)에서의 전투현장이었다. 여러 증언 중, 전쟁터로 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내 생전에 네 아버지 뼈 한 조각이나 머리털 한 올이라도 찾고 죽었으면 여한이 없겠다’던 전쟁미망인의 한탄을 생존해 있는 유복자 외아들로부터 전해들었으며, 미군의 전투 현장이었던 금강지역에서는 “이곳에서는 2-3년 전까지 미군들의 유해 발굴 사업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미군의 유골은 한 조각도 없을 것”이라는 주민의 증언을 청취하며 한편으로 부러움과 부끄러움, 그리고 사명감을 느꼈다.
모든 전선에서 그러하였지만, 백선엽이 이끈 다부동 전투에서도 수많은 전사자가 속출하였고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해 충분한 훈련 과정도 거치지 못한 모집 병력을 신속히 보충해야 했다. 이들은 소대장들과 충분한 대화도 나눌 여유가 없이 곧바로 전투 현장에 투입되었으며, 소대장들은 그들의 이름을 담뱃갑 쪽지에 적어 훗날 이름이라도 기억하려고 하였다 한다. 그야말로 과거 군가의 가사처럼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들의 희생 덕에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고 있으나, 아직도 13여 만 명의 전사자가 어느 이름 모를 산하에 묻혀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증언자는 점점 줄어들고 전투 현장의 흔적은 날이 갈수록 희미해지기 때문에 유해 발굴의 가능성은 점차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민족문제 연구소가 친일파로 규정한 사람들 중에는 백선엽 장군을 포함한 많은 전쟁영웅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일본 군대에서 근무했다는 이유 하나로 친일파라는 가시관을 쓰고 있지만, 전투 경험도 전무한 병사들을 지휘하여 이 나라를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낸 참 군인들이었다. 만약 일제 강점기 시절 그들이 훗날 친일파가 될까 두려워 손 놓고 있었다면 어느 누가 군대를 지휘하여 인민군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는 말인가? 더 더욱 나라도 군대도 없는 상황에서 지휘 기법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는 일본 군대 밖에 없었음을 감안하면, 결국 민족연구소 사람들의 비판은 일본군에서의 복무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당신들은 왜 그렇게 전투지휘를 잘해서 인민군을 막아냈느냐?”는 항의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 땅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한민국 성취의 주역을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표현의 일부는 맞을지 모르지만 정확한 표현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만약에, 인민 민주주의를 전 한반도에 실현하고자 했던 북한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이 땅에는 ‘자유민주주의’도 없을 것이고, 따라서 산업화 세력도, 민주화 세력도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당시 비록 일본 군대였지만 그곳에서 배운 지휘 기법과 전투 체험을 이용해 오늘의 자유와 풍요를 선사해 준 전쟁영웅들과 지금도 이름 모를 산하에서 가족의 품을 그리워하며 쓸쓸히 누워 계신 호국 영령들께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며, 그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함로써 다시는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가 위협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이종명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