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 주사파! 그들은 누구인가?’
‘바닥 빨갱이가 더 무섭다‘
필자(1956년생)가 어렸던 시절, 한국전쟁 시 공산당의 잔학상을 직접 체험하신 어르신들로부터 수 없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이다. 1950년을 전 후하여 이 땅에서 사셨던 분들은 한반도 북쪽에서 내려온 인민군보다 남한 내 거주하면서 공산주의 이념에 매몰된 공산주의자들의 잔인함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몸소 체험하였으며, 그 체험을 바탕으로 하신 말씀이 ’바닥 빨갱이‘이라는 표현이다.
’바닥 빨갱이‘를 지금의 용어로 표현하면 아마도 ’종북 주사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요즘 세상에 빨갱이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지만 이 땅에서는 여전히 ‘바닥 빨갱이’들에 대한 뉴스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얼마 전(11월 6일)에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오랫동안 민노총 간부로 활동한 인사들이 1심 판결에서 중형을 선고받기도 하였고(아래 참조), 여러 건의 간첩 사건들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전 조직쟁의국장(석모씨) :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
전 보건의료노조 조직실장(김모씨) :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
전 금속노조 부위원장(양모씨) :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
특히 이번 판결에서 3명의 전직 민노총 간부에게 각각 15년과 7년 그리고 5년의 중형이 선고되었다는 것은 이를 입증할 증거가 그만큼 충분하였다는 것이고, 그 증거는 북한의 지령으로 이들 활동의 배후에 북한이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 판결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안보 위협의 실체가 분명 함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많은 사람은 ‘종북 주사파’라는 용어가 공안 정국을 조성하거나 진보세력을 비난하기 위해 이를 반대하는 세력이나 일부 보수 언론 등에서 만들어진 용어라는 생각으로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기류가 있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
1. ‘종북 주사파’ 용어의 등장 배경
‘종북’이란 용어가 우리 사회에 알려지게 된 배경은 대한민국 내 진보정당 간의 통합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2001년 대한민국 내 대표적인 진보정당이었던 사회당과 민주노동당은 진보세력의 세 확장을 위해 통합의 과정을 밟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북한의 노선에 동조하는 민주노동당의 주장에 의해 통합 과정이 순탄치 않았으며 결국 사회당의 원용수 대표는 ‘조선노동당을 추종하는 종북세력과는 함께할 수 없다’는 선언을 함으로써 비로서 정당 내 종북세력의 실체를 폭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2006년에는 일심회 사건에서 민노당의 전(前)직 당원들이 연루됨으로써 더욱 내분이 격화되었고 정당 내 종북세력의 존재가 다시금 확인되었으며, 2007년에는 민주노동당 내에서도 홍세화 대표에 의해 그들의 행태가 다시 한번 만천하에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대 총선이 끝난 후 2012년 5월 통합진보당(후에 정당해산) 부정선거 의혹이 터지자 일부 매체들에 의해 ‘통진당 내 일부 인사들이 종북주의 성향이고 이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면서 종북에 대한 인식이 사회 전반에 더욱 확산되었다.
주사파(主思派)란 북한의 통치 이념이자 공산혁명사상인 ‘주체사상’을 추종하고 신봉하는 세력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1980년대 학생운동권 내 사상투쟁 과정에서 명명되었다. 당시 학생 운동권은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추종하는 PD(People's Democracy, 민중민주파)계와 북한노선을 추종하는 NL((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파)계로 나눠져 있었다. 이 때 PD계열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만이 정통 한국사회변혁운동의 지도사상이라고 강변하며 NL계를 변종인 북한 주체사상에 매몰되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주사파’라고 호칭한 데서 유래되었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종북 주사파’란 용어는 보수 언론이나 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내 진보를 지향하는 세력들과 학생 운동권 내에서 주도권 다툼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결론적으로 용어의 등장 배경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종북 주사파’ 세력은 진보와 학생 운동을 가장해 정치권과 여러 분야에서 북한을 추종하면서 그 세력의 확장을 도모했던 실질적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사진출처 :뉴스1
2. 종북 주사파의 어제와 오늘
북한에서 주체사상이 독자적인 사상체계로 정식화된 것은 1970년대이며,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종북 주사파가 형성된 시기는 1980년대로 북한의 대남혁명 전위조직인 ‘한국민족민주전선’(약칭 한민전)의 출범과 민족민주혁명당 창당의 주동자였던 김영환(현재는 북한의 인권 실상을 알리는데 선봉 역할)의 등장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한민전 출범 이후 대남 흑색 방송인 ‘구국의 소리방송’(일명 한민전방송)에서 시리즈로 주체사상 교양강좌, 정치철학 강좌,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론(NLPDR) 등을 송출하자 이를 비밀리에 청취하면서 국내 운동권에서는 주체사상 및 남한혁명론을 체계적으로 학습하기 시작했다. 특히 북한방송 청취 내용을 정리한 지하 간행물을 제작 배포한 것이 오늘날 ‘주사파’ 형성에 큰 영향력을 미쳤으며, 이중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김영환이 집필한 ‘강철서신’이었다.
김영환은 서울대학 재직시절 주체사상에 매료되어 ‘강철서신’을 집필하였을 뿐 만아니라 ‘89년에는 지하조직 '반제청년동맹(반청)'을 결성해 활동하다가 같은 해에 남파간첩(윤택림)을 만나 조선로동당에 현지 입당하였다. 2년 뒤에는 반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하여 평양에서 정식 입당식까지 치러 '관악산 1호'라는 대호(암호명)를 받았으며, 같은 해 5월 2차 밀입북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공작금 20만 달러를 받고 돌아와서 서울대 82학번 동기들과 함께 민족민주혁명당(약칭 민혁당)이란 지하당을 조직하고 학생운동, 통일운동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1998년 여수 앞 바다에서 경계작전 중인 우리 국군에 의해 발각되어 침몰된 북한의 반잠수정이 인양됨으로써 그 전모가 드러나 대대적인 수사와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침몰된 반 잠수정에는 김영환의 사상과 민혁당의 활동 등을 점검하기 위해 남파된 간첩의 시신과 증거 자료 등이 대량으로 확인됨으로써 주사파의 산실인 민족민주혁명당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들은 김영환을 중심으로 중앙위원을 구성하고 산하에는 지역위원회를 구성함으로써 전국적인 이적활동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지역조직이 남부위원회(위원장 이석기)이었으며, 이석기는 후에 경기동부연합의 실세로 자리 매김하였으며 훗날, 2013년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결에 따라 해산된 통합진보당의 주도 세력이었다. 또한 여러 언론 보도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현 민주노총위원장(양경수) 역시 경기 동부 연합 출신이며, 민노총 탄생 과정에서 NL(민족해방) 계열 운동권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세론(世論)이다. 최근 민노총의 젊은 세대 조직원들이 정치적 투쟁에서 벗어나 순수 노동운동을 펼칠 것을 요구했지만 여전히 민노총의 시위에 등장하는 구호가 단순한 노동 운동을 넘어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 연합 훈련 반대를 지향하는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아래는 2022년 8월 15일 집회에서 민노총이 낭독한 북한 노동자 단체의 선언문 일부)
3. 맺음 말
종북 주사파의 언행을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북한이 좋으면 북한에 가서 살아라”라고 질타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북한에 가지 않을 것이며, 갈 수 없다. 그 이유가 그들의 사명이 대한민국 내에서 갈등을 조장하며, 북한이 추구하는 ’남한 내 혁명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기에 북한행(行)에는 곧 처형이 뒤따를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뒷 받침하는 사례가 1997년 이적 단체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7년 동안 활동을 지속해온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가 금년(2024년) 김정은의 통일 추진 기구를 모두 해산하라는 방침을 내리자 자진 해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그 동안 ‘자주 통일’을 주장하여 왔지만 김정은의 한마디에 자진 해산하면서 ‘한·미·일 동맹 해체’ ‘주한미군 철수’ 등이 당면 과제라며 한국자주화운동연합(가칭)을 건설하겠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김정은이 구상하는 전쟁의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겠다는 의도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야말로 북한의 지령에 충실함으로써 생존을 유지하겠다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의 대남 전략 중 하나가 과거에는 (천안함 폭침 사건과 같이) 도발 주체를 은닉하면서 남남갈등을 유발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노골적인 군사적 도발을 통해 ‘전쟁과 평화’라는 주제로 남남갈등을 부추키고있다.
불행하게도 일부 국민들은 ‘평화’라는 선전에 달콤함을 느끼지만 결코 비겁한 평화는 진정한 안보를 보장해 주지 못했음을 역사적 교훈을 통해 인식해야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인 1938년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이탈리아가 맺었던 뮌헨 협정은 그 다음 해 히틀러에 의해 파기되었고, 1939년의 독일과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도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2년 후에는 휴지 조각이 되었다. 아울러 미국과 남•북 베트남과의 1973년 파리 협정도 북베트남에 의해 월남의 공산화되는데 일조하였을 뿐 결코 평화를 보장해주지 못했다. 지구 상에서 맺어졌던 대부분의 평화 협정은 일방의 국가가 상대방을 침략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할 때 까지만 유효했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부디,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전쟁과 평화’와 같은 국내 안보와 관련된 갈등의 배후에 종북 주사파 세력이 존재함을 인식하고, 나와 내 후손이 안전한 대한민국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70여 년 전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들께서 들려주신 ‘바닥 빨갱이’에 대한 교훈을 잊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종명 교수(전 국가정보원 3차장)